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타어 마테우스 (문단 편집)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경력 == 마테우스는 프로 데뷔 이듬해인 1980년,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전에서 데뷔했다. 나중에 독일 대표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성장했지만, 그랬던 마테우스도 초반부터 대표팀에서 주전을 꿰찼던 건 아니었다. [[파울 브라이트너]], [[베른트 슈스터]] 같은 명선배들이 활약하고 있었기에 1983년 이전까지 제법 오랜 기간 동안 교체 멤버에 머물렀다. 그러나 당시 마테우스는 무척 젊었고,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서독 국가대표팀에 만 19세의 나이에 발탁되었다는 것 자체가 마테우스가 지닌 잠재력이 당시에도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980년 당시 서독은 특히 주전 경쟁이 치열하던 시기였는데, 동시대에 분데스리가에서 날렸던 [[디터 뮐러]], [[베른트 슈스터]], [[클라우스 알로프스]] 같은 네임드들도 국가대표에 승선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만 19세의 나이에 마테우스가 발탁되었다는 사실은 독일 국가대표팀 역사에서도 분명 특기할 만한 일이다. 대표팀에 데뷔한 직후 [[UEFA 유로 1980|유로 1980]] 명단에 발탁되었다. 주로 교체 멤버로 활약하면서 서독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다.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1982 스페인 월드컵]] 그룹 스테이지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전에 교체로 투입되어 처음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이 대회에서도 로테이션 멤버나 교체 멤버로 활약했다. 이 대회에서는 서독 대표팀에서 부상 선수가 속출하였기에 대회 초중반에 로테이션 or 교체 멤버로 투입되었지만 대회 토너먼트 후반에는 루메니게가 회복하면서 별로 출전하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대표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1982 월드컵 이후 [[유프 데어발]] 감독이 대표팀의 [[세대교체#s-1|세대교체]]를 단행하면서 드디어 주전으로 도약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데어발 감독 시절에 천대받다가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이 등장하면서 핵심 멤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데어발 감독은 다가오는 1986 월드컵을 위해 대표팀의 조기 세대교체를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그 동안 대표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던 [[파울 브라이트너]]가 아직 31세의 나이로 한창 때였지만 세대교체를 위해 대표팀에서 하차시키고 마테우스를 주전으로 도약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마테우스가 처음으로 풀 주전으로서 참여한 [[UEFA 유로 1984|유로 1984]]에서 세대교체 와중에 있던 서독 대표팀은 그다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조기 탈락했고, 그 책임을 지고 데어발 감독이 사퇴하면서 후임으로 프란츠 베켄바워가 선임되었다. 일각에서 베켄바워가 부임하면서 세대교체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미 데어발 말기에 세대교체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고, 베켄바워의 스쿼드는 데어발 말기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1984년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이 선임 후에야 드디어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베켄바워호 서독 대표팀의 핵심 중 핵심이 되었다. 훗날 베켄바워의 회고 인터뷰에서도 당연하지만 마테우스가 항상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베켄바워호 초기의 팀 에이스였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비교해 봐도 마테우스에 대한 베켄바워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이 드러나는 인터뷰가 많다.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다. 결승전에선 [[펠릭스 마가트]]와 함께 [[디에고 마라도나]]의 마크맨으로 기용되었는데, 하프타임 감독의 지시로 인해 대인방어를 그만두고 올라가기 전까지 철저하게 묶었다. 이러한 지우개 역할은 소속 팀에서의 역할과는 다른 것이었는데, 아쉬운 점은 정작 팀의 코어였던 마가트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베켄바워 감독은 0:2로 패색이 짙어가던 결승전 후반에 가서야 마테우스를 올려 공격의 활로를 찾는 선택을 하고, 실제로 해당 시점 이후부터 서독의 공격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정작 마라도나가 살아나며 너무 늦은 선택이었음을 드러냈다. 과감히 마가트를 대신하여 마테우스를 공격의 중심으로 팀을 개편했으며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 부분. 마테우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베켄바워 감독은 처음에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의 전력을 과대평가하여 경기 중반까지 지나치게 수비적인 전술로 임했다가 두 골을 먹은 후에야 [[루디 푈러]]를 투입하며 공격적인 전술로 전환했다. 경기가 끝나고 베켄바워 감독은 자신의 전술적 선택을 후회했다고 한다. 1986 월드컵이 끝나고 서독 대표팀은 대표팀의 한 세대를 이끌어 왔던 루메니게, 알로프스, 마가트 등이 은퇴하고 1990 월드컵을 위한 체제로 전환되었으며, 베켄바워 감독의 강력한 신임을 받은 마테우스가 팀의 중심이 되었다. [[UEFA 유로 1988|유로 1988]]부터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며 팀의 핵심 에이스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이 대회에서 마테우스는 중앙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기용되어 자신의 탁월한 개인 전술을 마음껏 뽐낸다. 4강에서 [[리누스 미헬스]]가 이끄는 네덜란드를 만났는데 당시 네덜란드는 전성기의 [[오렌지 삼총사]]를 비롯한 강력한 스쿼드를 가진 팀이었다. 마테우스의 [[페널티킥]] 선제골에도 불구, [[로날드 쿠만]]의 [[페널티 킥]] 동점골에 이어 [[마르코 반 바스텐]]에게 경기 막판 역전골을 허용함으로써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오렌지 군단]]으로 도배된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된 것으로 그 활약을 가늠할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4231.vn/Lothar_Matthaus.jpg|width=100%]]}}} || || '''{{{#e0c9a5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 그리고 이 다음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90 이탈리아 월드컵]]을 마테우스는 자신의 대회로 삼는다. 대회 직전 시즌 큰 부상을 당해 시즌을 접고 반년 가량 쉬었으나 천운으로 월드컵 개막 타이밍에 맞추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서독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서 월드컵에 참여한 그는 늑대사령관이라는 별명답게 특유의 킥 테크닉으로 팀의 빌드업을 주도함은 물론 종종 올라가서 상대 수비를 직접 타격하는 드리블 능력과 장기인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을 과시하였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와 조별 리그 경기에서의 득점에서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libertaddigital.com/matthaus.jpg|width=100%]]}}} || || '''{{{#e0c9a5 월드컵을 들어올리는 마테우스}}}''' || 마테우스를 중심으로 한 서독 대표팀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고, 이 대회에서 마테우스는 전문 공격수가 아님에도 네 골을 기록하여 득점 공동 3위를 차지하는 등 전천후 맹활약을 바탕으로 1990년 [[발롱도르]]와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를 동시에 수상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서독이 아닌 독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메이저 대회인 [[UEFA 유로 1992|유로 1992]]에는 참가하지 못했고, 이 대회에서 팀을 이끌었던 대표팀 후배 [[위르겐 클린스만]]이 서서히 대표팀의 리더로 자리매김해 가기 시작한다. 30대 중반에 이르러 소속 팀 바이에른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리베로(스위퍼)로 포지션을 옮겼는데, 이후 대표팀에서도 리베로 역할을 맡게 된다. 다만 30대 초중반 이후 바이에른에서는 기본적으로 스위퍼에 바탕을 둔 리베로의 움직임을 보였다. 본래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에서 유로 1992 직전에 당한 아킬레스건의 심각한 부상은 그에게 저돌성과 기동력을 뺏어가 버렸고, 그는 대표팀과 소속 구단을 막론하고 오랜 경험의 노련함을 살려 수비수로 내려가 스위퍼로 전직하게 된다. 만 33세가 넘은 시점에서 참여했던 [[1994 FIFA 월드컵 미국|1994 미국 월드컵]]은 40도에 육박하는 유례 없는 폭염이 경기력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평균 연령이 31세가 넘어 대회 최고령 팀이었던 독일 대표팀은 무더위 속에서 급격한 체력 저하를 겪으며 똥줄 경기력으로 일관했다. 다만 전성기에 이른 클린스만이 팀을 캐리하는 양상을 띄기도 했다. 전 대회에 이어 주장으로 참가한 마테우스는 이 대회부터 리베로(스위퍼)로 포지션을 옮겨서 출전했고, 소속 팀에서 리베로로 활약했던 [[마티아스 자머]]는 대표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자머는 소속 팀에서 전성기 시절 마테우스처럼 포어 리베로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얼핏 둘의 공존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테우스는 무더위 속에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고 자머와 호흡에 문제를 노출했다. 마테우스뿐만 아니라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자머를 제외하면 다들 90년 우승 멤버들라 무더위 속에서 걸어다니며 빌빌 거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표팀의 막내이자 그나마 체력적으로 활발히 움직여 주던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한국전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대회 도중 강제 귀국 조치를 당하는 등 독일 대표팀은 내우외환을 겪으며 결국 8강에서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불가리아]]에게 발목을 잡힌다. [[UEFA 유로 1996|유로 1996]]을 앞둔 시점에서 아킬레스건 부상과 30대 후반으로 들어선 나이 문제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못하며 사실상 국가대표 은퇴 수순에 접어든 것으로 보였다. 사실 마테우스는 1994년 월드컵 이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고 때문에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한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당시 동일 포지션에 있던 [[마티아스 자머]]가 전성기에 이르렀고, 그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대표팀의 핵심이었던 [[위르겐 클린스만]]과 사이가 심하게 안 좋았다는 점이었다.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은 무척 오랜 기간 인테르, 바이에른, 그리고 대표팀에서 활동했지만,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다. 당시 클린스만은 포크츠 감독한테 대놓고 마테우스와 본인 둘 중에 한 명을 택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클린스만은 아직 전성기에 있었고, [[루디 푈러]]와 [[카를하인츠 리들레]]가 은퇴한 이후 공격수 난에 시달리던 서독 대표팀에서 클린스만 이외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반면 마테우스는 이미 은퇴할 나이를 넘긴 노장 중에서도 상노장이었으며, 마티아스 자머라는 걸출한 대체자가 존재했다. 게다가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데다 늙은 마테우스를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마테우스는 부상을 이유로 유로 1996 엔트리에서 배제되었고, 클린스만이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마테우스를 대신한 새로운 리베로 마티아스 자머가 팀을 캐리해 유로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이제 대표팀에서 마테우스가 모습을 보일 일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대표팀에서는 사실상 은퇴한 것으로 보였지만,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마티아스 자머]]가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자 대체자로 들어왔다. 이미 37세를 넘긴 노장 중 완전 노장이었다. 당시 비단 독일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여러 화제를 뿌렸던 발탁이었다. 당시 마테우스의 발탁을 상징적 의미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사실은 마테우스가 클럽에서 대표팀에 뽑힐 만큼 충분히 훌륭한 기량을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마테우스를 대체할 만한 대안도 없었다. 당시 마테우스는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분데스리가에서 정상급 수비수로 여전히 정상급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고, 소속팀인 바이에른도 마테우스가 있고 없고에 따라 경기력 차이가 제법 컸다. 독일 대표팀이 리베로를 둔 포메이션으로 오랫동안 운용되어 왔기 때문에 대회를 목전에 두고 갑자기 포백 등 새로운 포메이션으로 변경하는 것은 어려웠다. 사실 1998년 당시 독일 국내에서는 마테우스의 기량에 대한 의구심보다는 클린스만과 마테우스의 불화 때문에 팀 조직력이 와해될 것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선 상황이었다. 더구나 1996년 이후 클린스만이 대표팀 주장으로 이미 유로 1996 우승까지 일구며 대표팀 간판으로 자리잡은 터라 이전에 장기간 대표팀 주장을 맡아온 앙숙 마테우스가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지도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둘의 불화가 아니라 거의 노장들로만 구성된 독일대표팀을 지탱하던 마티아스 자머의 부재였고 투톱 비어호프와 클린스만의 활약으로 16강 멕시코전을 넘어 8강 크로아티아전에서도 전반전까지 골대를 강타하며 경기를 지배하다 경험이 부족했던 수비수 크리스티안 뵈른스의 다이렉트 퇴장으로 안 그래도 체력이 문제이던 독일은 후반전 내내 10명으로 싸워야 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른다. 여기에 크로아티아의 기가 막힌 중거리포가 작렬하면서 0-3으로 대회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 되며 광탈. 이 경기를 끝으로 클린스만은 대표팀에서 물러났고, 마테우스도 대표팀 은퇴가 기정사실화 되는 듯 했다. 결국 자머가 십자인대 무릎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선수 생활 자체를 그만 두게 되면서 수비수 공백을 메우지 못한 독일은 바이에른의 1998-99 챔스 준우승을 이끌 정도로 노익장을 불사르던 40이 다 된 마테우스를 [[UEFA 유로 2000|유로 2000]]에 재호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독일은 1승도 못 거뒀고, 심지어는 라이벌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에게도 32년 만에 패하며 1무 2패로 쓸쓸히 탈락했다. 유로 2000이 끝나고 150경기 출장을 끝으로 기나긴 대표팀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마테우스가 불혹이 다 된 나이에까지 대표팀에 중용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테우스는 40줄이 다 된 1999년에도 클럽인 바이에른에서 정상급의 활약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령의 나이에도 거진 풀 주전에 가까운 출장을 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1999년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특히 1999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후반 80분 마테우스가 교체된 후 팀이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마테우스가 대표팀에 차출된 것은 그의 기량 때문이었다. 혹자는 마테우스가 국가대표 리베로 자리를 지키고 싶어했기에 독일 대표팀은 당시 대세인 포백으로의 전환이 상당히 늦어졌으며, 이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독일 암흑기의 원인 중의 하나라고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포백으로의 전환이 시대에 맞지 않게 늦은 것도 사실이지만, 마테우스가 포지션 고집을 한 것이 그 원인이라는 것도 낭설에 가깝다. 당시 마테우스는 대표팀 발탁을 좌지우지할 입장이 아니었다. [[리베로]] 자리는 독일 대표팀의 상징과 같은 포지션이기 때문에 역대 감독들은 세계적인 축구 전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리베로 포지션만을 고수해 왔다. 독일 대표팀에선 베켄바워, 마테우스, 자머와 같은 뛰어난 실력과 팀원들을 통솔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리베로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이런 뛰어난 리베로가 존재할 때 독일 대표팀은 최고의 모습을 보였으며, 카리스마 있는 리베로가 부재하던 시기 독일은 결승, 4강 등에서 번번히 [[물먹다|물을 먹은]] 경우가 상당했다. 조직력과 팀정신(Team Geist)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독일 대표팀에서 선수들을 하나로 묶고 경기를 조율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는 리베로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마테우스를 대표팀에서 일시 퇴출시킨 포크츠 감독 역시 리베로 포지션을 고수했는데, 이 역시 마티아스 자머라는 걸출한 리베로의 존재 때문이었다. 후임 [[에리히 리베크]] 감독 역시 리베로 포지션을 고수했다. 그런데 자머는 마테우스보다도 오히려 더 빨리 기량이 쇠퇴했고, 때문에 마테우스를 중용했던 것. 하지만 이에 대해 그 전부터 감독 자리 문제와 선수단 지휘 방식을 놓고 갈등이 있었던 수석코치 [[울리 슈틸리케]]는 마테우스의 [[스위퍼(축구)|스위퍼]] 기용과 쓰리백에 반대하며 격한 갈등을 빚다가 물러나는 일까지 빚어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울리 슈틸리케는 베켄바워와 마테우스 사이에 활약했던 스위퍼였다는 것이다. 다만 슈틸리케는 바켄바워나 마테우스, 자머만큼의 창의성과 카리스마를 가진 리베로는 아니었기에 당시 서독 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는 [[파울 브라이트너]]가 맡았고, 때문에 슈틸리케는 리베로가 아닌 그냥 스위퍼로 불리고 있다. 마테우스 은퇴 후 옌스 노보트니가 등장하며 스위퍼 위치를 다른 중앙 수비수들 쪽으로 올려가며 [[루디 푈러]] 감독 부임 후에야 포백이 정착되었다. 정리하자면 당시 서독 대표팀의 에이스로서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주축으로서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 로테이션 or 교체 멤버로 [[UEFA 유로 1980|유로 1980]] 우승 및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1982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에 기여했다. 축구 역사상 이처럼 화려한 국제 대회 성적을 기록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